노벨토익

대리님, 이건 업무 외입니다

반차 · 오피스 로맨스 · 토익 700~900점대 추천 · 전 94화

말하지 못한 것들이 전부 사내 문서에 남았다.

전체 회차

  1. 1화 담당자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은호는 잠깐 숨을 멈췄다. 낯선 냄새, 낯선 소음, 낯선 시선들. "신입사원이죠? 오늘부터 제가 담당이에요." 돌아보니 셔츠 소매를 손목까지 단정히 채운 남자가 서 있었다. 표정에 큰 감흥이 없었다. 은호는 습관처럼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
  2. 2화 첫 업무 — 수요일 아침, 은호는 회의실 구석에 앉아 노트를 폈다. 팀장이 안건을 하나씩 짚어가는 동안, 은호는 절반쯤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옆자리에서 태경이 조용히 서류 한 장을 밀어줬다. 회의에서 나올 용어를 미리 정리해둔 종이였다. 필요한 것만 딱 열 줄. 인사도 설명도 없…
  3. 3화 사소한 것들 — 일주일이 지나자 은호는 이 사무실의 규칙 같은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됐다. 복사기는 오후 세 시쯤 항상 종이가 걸린다는 것. 탕비실 커피는 두 번째 칸 것이 낫다는 것. 그리고 태경은 아무리 더워도 소매를 걷지 않는다는 것. 한여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팔을 걷어붙…
  4. 4화 파트너 — 목요일 오후, 팀장이 두 사람을 회의실로 불렀다. "이번 분기 해외지사 확장 프로젝트, 은호 씨 교육 겸 태경 씨랑 같이 붙어서 해줘요." 짧은 통보였다. 은호에게는 예상 밖의 반가움이었고, 태경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미묘하게, 아주 미묘하게 굳는 걸 은호는 놓치지…
  5. 5화 야근 — 첫 야근이었다. 밤 아홉 시가 넘자 사무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형광등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은호가 자료를 넘기다가 무심코 물었다. "대리님은 야근 자주 하세요?" "필요하면요." "필요 없는 날도 있어요?" 태경이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은호를 봤다. 잠깐이었…
  6. 6화 정우 —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신입이죠? 옆 팀 정우예요." 붙임성 좋게 웃는 얼굴이었다. 몇 마디 나누는 사이에 이름도, 부서도, 점심 자주 가는 식당까지 알게 됐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첫날부터 손 내밀었다가 민망해진 기억이 아직…
  7. 7화 사람들이 하는 말 — 점심시간, 옆자리 선배가 밥을 먹다 말고 슬쩍 말을 꺼냈다. "저 대리님, 이번에 지사장 승진 1순위래." "아, 그래요?" "근데 성격이 워낙 벽 치는 스타일이라, 사적으로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선배가 젓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실력은 진짜 좋아. 근…
  8. 8화 폭염 — 폭염 특보가 뜬 날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태경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셔츠 등판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는데도, 소매는 여전히 손목까지 내려와 있었다. 회의 중이었다. 태경이 자료를 넘기다 말고 갑자기 휘청했다. 책상을 짚고서야 겨우 버텼다. "대리님?"…
  9. 9화 벽 — 그날 이후 태경은 더 사무적으로 변했다. 필요한 말만, 딱 그만큼만. 은호가 다가가려 하면 미묘하게 거리를 뒀다. 회의에서도 시선이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며칠을 망설이던 은호가 결국 물었다. "그때 화내신 거,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태경이 한참 침묵하다 낮게…
  10. 10화 묻지 않는 법 — 그 뒤로 은호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곁에 있기로 했다. 태경이 야근할 때 말없이 커피를 놓고 갔다. 소매 얘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태경이 어쩌다 실수를 해도 다른 사람들처럼 놀리지 않고 그냥 넘겨줬다. 처음 며칠은 태경도 경계했다. 커피…
  11. 11화 조금씩 — 10월이 되자 공기가 달라졌다. 태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큰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가끔 먼저 말을 걸고, 점심을 같이 먹는 정도. 하지만 태경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드문 일이라는 걸, 은호는 옆자리 선배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선배가 은호에게…
  12. 12화 이유 — 11월 첫 주, 은호는 우연히 태경의 책상 위 서류를 보게 됐다. 작년 인사평가서였다. 팀장이 실수로 놓고 간 모양이었다. 은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지만, 한 줄이 눈에 박혔다.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늘 더 많이 떠안으려 함.* *권한 위임을 거의 하지 않…
  13. 13화 뉴스 — 11월 중순, 사무실 티브이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뉴스가 있었다. 아파트 화재 소식이었다. 새벽에 불이 났고, 한 층이 전소됐다는 짧은 보도. 은호는 별생각 없이 화면을 보다가, 무심코 옆을 봤다. 태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놓칠 뻔했다…
  14. 14화 오늘 무슨 날이에요 — 퇴근 무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사무실이 조용해질 즈음 은호가 태경의 자리로 갔다. "대리님." 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오후 내내 그랬듯 표정이 없었다. 은호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태경이 흠칫했다. 부정하려는 듯 입을…
  15. 15화 빗속에서 — 우산을 챙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건물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다. 굵은 빗줄기가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 내내 팽팽하게 조여 있던 공기가, 그 빗소리에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한참 말없이 비를 보던 태경…
  16. 16화 열두 살 — 태경이 다시 돌아와 은호 옆에 섰다. 또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은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태경이 낮게 중얼거렸다. "다들 뭔가 있다는 건 아는데, 아무도 안 물어보는 사람은 은호 씨가 처음이라."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17. 17화 다음 날 — 다음 날 아침, 태경은 출근하지 않았다. 휴가라는 걸 은호는 알고 있었다. 어제 그 말을 들었으니까. 그런데도 빈자리를 볼 때마다 자꾸 시선이 갔다. 점심때 옆자리 선배가 물었다. "대리님 오늘 안 오시네?" "휴가요." "아, 그 날짜구나." 선배가 별생각 없이 말…
  18. 18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 다음 날 아침, 태경이 출근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모습이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부어 있는 것 말고는. 은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오전 내내 둘 다 평소처…
  19. 19화 새 얼굴 — 12월 첫째 주, 팀에 새 사람이 왔다. "인사해요. 이번 확장 프로젝트 같이할 지안 과장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는 순간, 태경의 표정이 순간 굳는 걸 은호는 놓치지 않았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했다. 지안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 태경…
  20. 20화 두 사람의 방식 — 월요일 회의에서 지안이 계약안을 발표했다. 깔끔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슬라이드도, 말투도, 질문에 답하는 속도까지. 팀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발표가 끝나갈 무렵 태경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계약 기간이 열두 달로 되어 있는데요. 프로젝트 일정은 열네…
  21. 21화 그런 말 — 그날 저녁, 은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과장님이 아까 복도에서 뭐라고 하셨어요?" 태경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별말 아니에요." "제가 찾은 거라고 하셨어요?" 이번엔 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은호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건 은호 씨…
  22. 22화 본사에서 온 사람 — 12월 셋째 주, 본사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전략기획팀 하윤 차장님이세요. 이번 확장 건 검토차 2주간 상주하실 거예요." 단정한 인상이었다. 인사를 나누는 태도가 지안과는 또 달랐다. 지안이 웃으면서 날을 세우는 쪽이라면, 하윤은 웃지 않으면서도 편안한 쪽이었다.…
  23. 23화 아는 사이 — 점심시간, 하윤과 태경이 같이 나가는 걸 봤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본사에서 온 사람이니 업무 얘기도 많을 테고, 옛 동료라니 할 말도 많을 것이다. 은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에 하윤이 은호에게 물었다. "은호 씨가 계약서에서 기간 문제 찾았다면서요?"…
  24. 24화 이름 — 연말 회식이 잡혔다. 부서 전체가 모인 자리였고, 하윤도 초대됐다.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뷔페식이라 다들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눴다. 은호는 몇 번인가 태경 쪽을 봤다. 하윤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태경이 뭔가를 말하고 하윤이 짧게 웃었다. 그…
  25. 25화 회식 다음 날 — 다음 날 아침, 은호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이유는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그 기분을 지우고 싶었을 뿐이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그런데 태경이 이미 와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은호 씨도요." 잠깐의 정적. 은호는 자리에 앉으며…
  26. 26화 크레딧 — 목요일 발표에서 지안이 슬라이드를 넘기다 말했다. "이 부분 전환율 분석은 강은호 사원이 작성했습니다." 회의실 사람들이 은호 쪽을 봤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는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발표가 끝나고 복도에서 지안이 은호에게 말했다. "잘 썼더라고요." "…
  27. 27화 그 밤 — 1월 둘째 주, 사고가 났다. 시스템 오류로 프로젝트 자료가 통째로 날아갔다. 백업본조차 없었다. 발표가 이틀 뒤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사무실엔 은호와 태경뿐이었다. "이거 다시 만들려면 최소 다섯 시간이에요." 태경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묻어났다. "그…
  28. 28화 새벽빛 —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마지막 파일이 저장됐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에서 눈을 떼자 사무실 창밖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해 뜨네요." 은호가 말했다. 태경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밤을 꼬박 새운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나…
  29. 29화 먼저 알았던 사람 — 하윤의 검토 기간이 일주일 남았을 때였다. 은호가 자료실에서 서류를 찾고 있는데 하윤이 들어왔다. 둘만 남은 좁은 방이었다. "은호 씨." "네." "하나 물어봐도 돼요?" 하윤이 서류함을 열며 말했다. "태경이 요즘 좀 괜찮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네…
  30. 30화 물어보지 않는 것 — 그날 저녁, 은호는 태경 자리 옆에 오래 서 있었다. 물어보고 싶었다.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하윤은 알고 나는 모르는지.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 은호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묻는 것이 늘 다가가는 방법은 아니라는 거였다. 8월에 "…
  31. 31화 검토가 끝나고 — 하윤의 검토 마지막 날이었다. 퇴근 무렵, 하윤이 은호에게 왔다. "은호 씨. 저 내일 올라가요." "아, 벌써요." "2주 금방이더라고요." 하윤이 잠깐 말을 골랐다. "그리고 저번에 자료실에서 한 말요."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실수했어요." 하윤이 담담하…
  32. 32화 남은 자리 — 하윤이 떠난 다음 주, 사무실이 조금 조용해졌다. 은호는 자기가 안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안심이 부끄러웠다. *나쁜 사람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마지막 날에 사과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없어지니 마음이 편해졌다는 게, 은호는 스스로 마음…
  33. 33화 우산 — 2월 초, 갑자기 비가 내렸다. 퇴근길에 두 사람이 같이 나섰는데 은호만 우산이 있었다. 접이식 작은 우산이었다. "같이 쓰죠." "괜찮아요. 지하철역까지 금방이에요." "금방이어도 젖어요." 은호가 우산을 태경 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대리님 감기 걸리면 제가 일…
  34. 34화 지안의 말 — 2월 중순, 지안이 태경을 회의실로 불렀다. 문이 닫혔다. 은호는 자기 자리에서 그 문을 한 번 봤다. 안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태경 씨, 이번 승진 평가에 팀워크 항목이 꽤 크게 들어갔어요." "들었습니다." "근데 태경 씨는 워낙 혼자 하는 스타일이잖아."…
  35. 35화 거리 —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벌어졌다. 태경은 더 이상 야근을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다. 회의에서도 필요한 말만 짧게 주고받았다. 점심도 따로 먹는 날이 늘었다. 은호는 처음엔 그저 프로젝트가 막바지라 바빠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그…
  36. 36화 창가 — 주말 저녁, 정우와 마주 앉은 자리는 편안했다. 정우는 말도 잘 통했고, 유쾌했고, 무엇보다 애쓰지 않아도 대화가 이어졌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화 중간중간, 은호는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드는 걸 느꼈다. 무뚝뚝하지만 뜨거웠던 손. 비 오던 밤의 젖은 목소리.…
  37. 37화 어긋남 — 월요일 아침, 태경이 평소보다 일찍 나와 있었다. 은호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태경은 은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후 회의에서 은호가 자료를 설명하는 동안에도 태경은 화면만 봤다. 질문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
  38. 38화 발표 전날 — 발표 전날 밤, 사무실에 은호 혼자 남았다. 태경은 여섯 시에 퇴근했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발표 전날에. 은호가 슬라이드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는데, 지안이 들어왔다. "아직 있었네요." "네, 곧 갑니다." 지안이 은호 옆에 서서 화면을 봤다. "이 섹션,…
  39. 39화 발표 — 목요일 아침, 대회의실. 태경이 발표를 시작했다. 첫 슬라이드가 화면에 떴다. 기여자 목록이었다. 강은호. 세 번.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은호 쪽을 봤다. 은호는 자기가 그 슬라이드를 어제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밤사이에 바뀐 것이다. "시장 분석과 전환율…
  40. 40화 그날 저녁 — 발표가 끝난 그날 저녁,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그러셨어요?" "뭘요." "슬라이드요. 어젯밤에 바꾸셨잖아요." 태경이 자료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원래 그렇게 했어야 했으니까요." "평가에 안 좋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41. 41화 발령 — 3월 첫째 주 월요일, 인사 발표가 났다. 사내 게시판에 공지가 올라온 건 오전 열 시였다. 은호는 그 시간에 창고 재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옆자리 선배가 먼저 봤다. "야, 났다." 은호가 화면을 열었다. *신설 싱가포르 지사장 — 이태경 대리* 숨이 잠깐 멎…
  42. 42화 캐비닛 — 수요일 저녁, 은호는 3층 자료실에 갔다. 시설팀이 물어본 캐비닛을 직접 보고 싶었다. 태경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고, 시설팀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철제 캐비닛이었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라벨이 붙어 있었다. 은호가 서랍을 열어봤다. 종이 서류가…
  43. 43화 열쇠 — 목요일 아침, 태경이 은호를 불렀다. "어제 자료실 일요." "…네." "미안해요. 말투가 좀 그랬어요."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았을 텐데." 태경이 잠깐 말을 골랐다. 그러곤 책상 서랍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통관 대행사에서 연락 왔죠.…
  44. 44화 인수인계 — 3월 중순, 인수인계가 시작됐다. 태경은 4월 말에 떠난다. 그때까지 프로젝트 실행 단계의 기반을 다 넘겨야 했다. 문제는 넘겨받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분간은 은호 씨가 실무를 맡아요." 팀장이 말했다. "정식 후임은 6월에 뽑을 거고." "저요?…
  45. 45화 남은 시간 — 4월이 됐다. 인수인계는 순조로웠다. 너무 순조로워서 이상할 정도였다. 태경은 하루에 서너 시간씩 은호와 붙어 앉아 하나하나 넘겼다. 2주 동안 거리를 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은호는 그게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이렇게 다 넘기고 나면, 이제 뭐가 남지.…
  46. 46화 출국 준비 — 4월 셋째 주, 태경의 출국 준비가 시작됐다. 비자 서류, 항공권, 현지 숙소. 회사에서 대부분 처리했지만 본인이 해야 할 것도 있었다. 수요일 점심, 은호가 물었다. "숙소는 정해지셨어요?" "회사에서 3개월은 서비스드 레지던스 잡아줬어요. 그다음은 알아서." "가…
  47. 47화 마지막 출장 — 4월 넷째 주, 두 사람은 마지막 출장을 갔다. 부산에서 열리는 물류 컨퍼런스였다. 싱가포르 지사에서 쓸 현지 파트너를 물색하는 게 목적이었고, 원래는 태경 혼자 갈 예정이었다. "은호 씨도 같이 가요." 팀장이 말했다. "어차피 실무 이어받을 거니까 얼굴은 익혀둬야…
  48. 48화 부산 — 컨퍼런스 첫날, 은호는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명함을 스무 장쯤 받았고, 이름을 절반도 못 외웠다. 세미나 세 개를 들었고, 두 개는 절반쯤 이해했다. 저녁 환영회에서 태경이 은호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강은호 사원입니다. 5월부터 실무를 맡습…
  49. 49화 돌아오는 길 — 일요일 오후, 돌아오는 KTX. 은호는 창가에, 태경은 통로 쪽에 앉았다. 어제 가로등 밑에서 들은 말이 계속 맴돌았다. *착각 아니에요.* 그 말 이후로 두 사람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해서 각자 방으로 들어갔고, 오늘 아침에는 평소처럼 인사했고,…
  50. 50화 공사 — 4월 마지막 주, 사무실에 공사가 시작됐다. 싱가포르 지사로 인력이 빠지면서 층 배치가 바뀌는 거였다. 3층 자료실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회의실이 두 개 들어선다고 했다. 월요일 아침, 공사 안내문이 붙었다. *4월 28일부터 5월 9일까지. 3층 전면 공사. 소음…
  51. 51화 점검 — 공사 사흘째, 소방 점검이 잡혔다. 건물 전체 연례 점검인데 공사 일정과 겹쳐서 앞당겨진 거였다. 오후 두 시에 화재경보기 시험이 있고, 전 직원이 대피 훈련에 참여해야 했다. 은호가 안내문을 읽다가 문득 생각났다. *작년에 대리님, 영상 부분에 안 계셨지.* 작년에…
  52. 52화 지하 창고 — 지하 창고는 조용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고, 재고 선반이 줄줄이 서 있었다. 두 시가 되자 위층에서 아주 희미하게 소리가 들렸다. 정말 희미했다. 두 사람은 재고 목록을 하나씩 확인했다. "품번 3104, 열두 개." "열두 개 맞아요." 한동안 그렇게만 했다.…
  53. 53화 빈자리 — 4월 30일, 태경의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원래는 28일에 떠날 예정이었는데 항공편을 5월 2일로 바꿨다. 이유는 인수인계 항목이 남아서라고 했다. 그런데 은호가 보기에 인수인계는 이미 다 끝나 있었다. 오전에 태경이 자리를 정리했다. 3년 치 짐인데 상자 두 개가…
  54. 54화 편지 — 은호는 그 종이를 그날 밤 집에서 열었다. 한 장이었다. 손글씨였다. *은호 씨에게* *이걸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서 세 번 버렸습니다. 네 번째로 씁니다.*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셨죠. 하윤 씨한테 들으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회사를…
  55. 55화 다음 날 — 5월 1일, 두 사람은 만났다. 회사가 아니라 한강이었다. 태경이 그러자고 했다. 날이 맑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지나갔고, 강물이 반짝였다. 두 사람은 한참 말없이 걸었다. "편지 읽었어요." 은호가 먼저 말했다. "…네." "끝까지 안 쓰셨더라고요." 태경이…
  56. 56화 출국 — 5월 2일 아침, 인천공항. 은호는 배웅을 나가지 않기로 했었다. 어제 그렇게 말했고, 태경도 그러라고 했다. 아침 여섯 시 비행기였고, 공항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은호는 새벽 세 시에 눈을 떴다. 출국장 앞에서 태경을 찾는 데 십 분이 걸렸다. 짐은 캐리어…
  57. 57화 시차 — 한 시간이었다. 싱가포르와 서울의 시차. 은호는 그게 얼마나 짧은 건지, 그리고 얼마나 긴 건지를 그달에 알게 됐다. 태경은 도착한 날 연락을 했다. 사진 한 장과 짧은 문장이었다. *도착했어요. 여기 덥네요.* 그다음 주에는 두 번. 그다음 주에는 한 번. 바쁜 게…
  58. 58화 공고 — 6월 3일 화요일, 사내 게시판에 공고가 떴다. *싱가포르 지사 내부 지원 — 운영 담당 1석* 은호는 그 공고를 세 번 읽었다. 자격 요건, 마감일, 제출 서류. 다 아는 내용이었다. 이미 두 달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화면에 뜨니까 손이 조금 떨렸다…
  59. 59화 지원 사유 — 은호는 사흘 동안 그 칸을 채우지 못했다.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많아서였다. 그리고 그중에 적어도 되는 것과 적으면 안 되는 것이 섞여 있었다. *해외 근무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실무를 이어받았으므로 인수인계 손실이 적…
  60. 60화 장마 — 7월이 됐다. 서울은 장마였다. 일주일 내내 비가 왔고, 사무실 창문에 물이 흘러내렸다. 발표는 4일이었다. 그때까지 은호는 평소처럼 일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자료를 넘기고, 여섯 시에 퇴근했다. 태경이 남긴 인수인계 메모대로 재고 기준점은 그대로 뒀고, 결재는 2…
  61. 61화 7월 4일 — 오전 열 시, 사내 게시판에 결과가 올라왔다. 은호는 그 시간에 창고 재고를 세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잡았다. 자리에 앉아서 화면만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지하에서 올라오니 옆자리 선배가 먼저 봤다. "야, 났어." 은호는 손을 씻고 자리에 앉았다. 마우스를…
  62. 62화 사흘 — 태경은 7월 5일 아침에 도착했다. 인천공항 입국장. 은호가 마중을 나갔다. 이번엔 새벽 세 시에 깨지 않았다. 알람을 맞추고 잤고, 아침을 먹고 나왔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태경이 보였다. 캐리어 하나. 두 달 전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잠깐 마주 본…
  63. 63화 우산 하나 — 카페는 공항 근처였다. 두 달 만에 마주 앉으니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나온 건 업무 얘기였다. 현지 채용은 어떻게 됐는지, 서울 쪽 결재는 어떤지, 창고 재고 기준점은 그대로 뒀는지. "기준점 안 건드렸어요." 은호가 말했다. "잘했어요." "메모에 그렇…
  64. 64화 두고 온 것 — 7월 7일, 태경이 돌아가는 날이었다. 사흘 동안 두 사람은 특별한 걸 하지 않았다. 밥을 먹었고, 걸었고, 비가 오면 우산 하나를 같이 썼다. 은호가 근무하는 낮에는 태경이 혼자 서점에 가 있었다. 마지막 날 저녁, 태경이 물었다. "짐 정리는 언제부터 해요?" "…
  65. 65화 후임 — 7월 중순, 후임이 정해졌다. 옆 팀에서 온 2년차였다. 이름은 세연. 조용하고 메모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인수인계는 2주였다. 은호는 태경이 자기에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갔다. 문서에 있는 건 문서로 넘기고, 문서에 없는 것만 따로 적었다. *창고 관리자는…
  66. 66화 마지막 출근 — 8월 29일, 은호의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1년 조금 넘게 앉은 자리인데 짐이 생각보다 많았다.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다가, 서랍 맨 안쪽에서 작은 열쇠가 나왔다. 작년 여름에 받은 것이었다. 은호는 그걸 한참 손바닥에 올…
  67. 67화 캐비닛 — 8월 20일에 이사업체가 왔다. 은호는 짐을 다 싸두었다. 상자 열두 개와 캐비닛 하나. 캐비닛은 태경의 집에서 일주일 전에 가져왔다. 빈집이었다. 태경이 비밀번호를 알려줬고, 은호가 혼자 들어가서 그것만 가지고 나왔다. 수거 담당자가 목록을 확인하며 물었다. "이…
  68. 68화 빈방 — 8월 31일, 계약이 끝났다. 집주인이 와서 확인하고 보증금을 돌려줬다. 은호는 열쇠를 넘기고 나왔다. 출국은 9월 3일이었다. 사흘 동안 본가에 있기로 했다.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태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짐 다 보냈어요?" "네. 20일에요." "캐비닛도요?"…
  69. 69화 9월 3일 —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착륙 직전, 은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배들이 점처럼 떠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는 비가 왔는데, 여기는 맑았다. *오후 두 시 사십 분.* 입국 심사는 생각보다 빨랐다. 짐을 찾고, 카트를 밀고, 출구로 나왔다. 사람이 많았다. 이름을…
  70. 70화 첫 주 — 첫 주는 정신이 없었다. 관공서 등록, 은행 계좌, 통신사. 안내문에 적힌 대로 하나씩 해나갔는데, 실제로는 안내문에 없는 일이 더 많았다. 목요일 아침, 은호가 처음으로 지사 사무실에 출근했다. 작았다. 서울 사무실의 3분의 1쯤. 자리가 여덟 개였고, 그중 넷이…
  71. 71화 MJ — MJ는 말이 많았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MJ가 물었다. "So how long have you known him?" "About a year." "A year." MJ가 젓가락을 멈췄다. "Only a year?" "…네. 왜요?" MJ가 잠깐 뭔가 생각하는 표정…
  72. 72화 소매 — 9월 말, 지사에 첫 컨테이너가 도착했다. 은호의 이삿짐이었다. 상자 열두 개와 캐비닛 하나. 토요일 오전, 태경이 서비스드 레지던스로 왔다. 짐 옮기는 걸 돕겠다고 했다. 상자를 나르는데 태경이 셔츠 소매를 걷었다. 이번에는 은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상…
  73. 73화 맨 아래 서랍 — 케이블타이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태경이 열쇠를 손바닥에 놓고 잠깐 봤다. 1년 넘게 은호가 갖고 있던 것이었다. "…열게요." "네." 자물쇠가 돌아가고, 서랍이 천천히 열렸다. 안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태경이 그걸 꺼냈다. 봉투는 오래돼…
  74. 74화 날짜 칸 — 두 사람은 한참 그 종이를 봤다. 날짜 칸이 비어 있었다. 사유 칸도 비어 있었다. 이름만 적혀 있고, 서명도 없었다. "이거," 은호가 말했다. "다 안 쓰셨네요." "…네." "왜요?" 태경이 잠깐 생각했다. "날짜를 쓰면 정말 낼 것 같아서요." 은호는 그 말이…
  75. 75화 파쇄기 — 파쇄기는 사무실 구석에 있었다. 은호가 접힌 종이를 들고 그 앞에 섰다. 태경은 두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진짜 넣어요?" "네." "한 번 더 안 보셔도 돼요?" "안 봐도 돼요." 은호가 종이를 기계에 넣었다. 짧은 소리가 나고, 종이가 사라졌다. 그게 다였다.…
  76. 76화 첫 회의 — 10월 첫 주, 은호의 첫 지사 회의였다. 참석자는 넷이었다. 태경, 은호, MJ, 그리고 행정 담당 직원. 회의는 영어로 진행됐다. 은호는 절반쯤 알아들었고, 나머지는 눈치로 채웠다. MJ가 물류 일정을 설명하는 중간에 은호가 손을 들었다. "Sorry — the…
  77. 77화 하윤 — 10월 중순, 본사에서 사람이 왔다. 싱가포르 지사 3개월 점검이었다. 서울에서 두 명이 오는데, 그중 한 명이 하윤이었다. 은호가 그 이름을 명단에서 봤을 때 잠깐 멈췄다. *하윤 차장.* 작년에 본사에서 왔던 사람. 태경의 입사 동기.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 나란히…
  78. 78화 둘째 날 — 목요일 아침, 은호가 다시 만든 자료를 냈다. 하윤이 그걸 십 분쯤 봤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네." "어제보다 낫네요. 어제 건 왜 그랬어요?" "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솔직하네." 하윤이 서류를 덮었다. "그거 좋은 습관이에요." 점심때 하…
  79. 79화 되묻기 — 은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장님." "네." "제가 뭐라고 답하길 바라세요?" 하윤이 은호를 봤다. "…무슨 뜻이에요?" "제가 '네,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차장님이 편하실까요. 아니면 '달라졌습니다'라고 하면요." 하윤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0. 80화 물어보지 않은 것 — 점검이 끝나고 하윤이 떠나던 날, 태경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갔다. 은호는 사무실에 남았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쯤 뒤에 태경이 돌아왔다. 자리에 앉더니 한참 화면만 봤다. "…물어봤어요." 태경이 말했다.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뭘요." "3년 전에 왜…
  81. 81화 심사 — 11월, 은호도 파견 심사 대상이 됐다. 정확히는 3개월 시범 기간 종료 심사였다. 계속 남을지, 서울로 돌아갈지를 본인이 적어 내는 절차였다. 양식을 열었을 때 은호는 잠깐 멈췄다. *희망 사항: □ 연장 □ 원소속 복귀 □ 제3지역 전보* 작년 여름에 지원서 사유…
  82. 82화 열한 날 — 결과 통보가 온 날, MJ가 웃으면서 말했다. "So you're both staying." "…네." "He submitted his eleven days before you." MJ가 서류를 넘겼다. "I saw the timestamps when I filed…
  83. 83화 12월 — 12월이 됐다. 싱가포르에는 겨울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렸지만 밖은 삼십 도였다. 지사 첫 연말 회식이 잡혔다. 다섯 명이었다. 태경, 은호, MJ, 행정 담당, 그리고 11월에 들어온 신입. 식당에서 MJ가 물었다. "So how do you two kno…
  84. 84화 열두 살 —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지사는 오후에 문을 닫았다. MJ와 다른 직원들은 각자 약속이 있었고, 은호와 태경만 남았다. "저녁 어떻게 하실 거예요?" "…딱히요." "그럼 같이 드실래요?" 두 사람은 지사 근처 국숫집에 갔다. 크리스마스에 국수를 먹는 게 이상했지만, 문…
  85. 85화 국숫집 — 국물이 식어가고 있었다. 은호가 물었다. "열두 살 때요." "네." "그 얘기 아버지한테도 하셨어요?" "…아니요." 태경이 말했다. "전화로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럼 뭐라고 하셨어요?" "생신 축하드린다고요." 태경이 짧게 웃었다. "그게 다예요." "…그거면…
  86. 86화 1월 — 새해가 됐다. 1월 둘째 주, 지사에 손님이 왔다. 현지 물류업체 대표였다. 계약 갱신 협의였고, 태경과 은호가 함께 나갔다. 협의는 세 시간 걸렸다. 상대는 단가 인상을 요구했고, 태경은 물량 확대를 조건으로 걸었다. 중간에 상대가 은호를 봤다. "And you a…
  87. 87화 2월 — 2월, 은호가 감기에 걸렸다. 싱가포르에서 감기에 걸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밖은 삼십 도인데 사무실 에어컨이 이십사 도로 고정되어 있었다. 목요일 아침, 은호가 자리에서 기침을 세 번 했다. 태경이 화면에서 눈을 뗐다. "…약 먹었어요?" "네." 한 시간 뒤,…
  88. 88화 통풍구 — 금요일 아침, 은호가 먼저 출근했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은호가 자기 자리 위 통풍구를 봤다. 닫혀 있었다. 의자를 끌어와 올라섰다. 통풍구 두 개를 다시 열었다. 그러곤 태경 자리로 갔다. 문가 자리 위 통풍구를 절반쯤 닫았다. 내려와서 의자를 제자리에 놓았을…
  89. 89화 3월 — 3월, 프로젝트 실행 단계가 끝났다. 1년 반 전 서울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시장 분석, 공급업체 리스크, 계약 검토. 은호가 처음부터 맡았던 부분들이 전부 실제 숫자로 돌아왔다. 이사회 보고가 화상으로 진행됐다. 서울에서 임원 넷이 접속했고, 싱가포르에서 태경과 은…
  90. 90화 남은 말 — 보고가 끝나고 화면이 꺼졌다.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저녁 일곱 시였고, MJ와 다른 직원들은 이미 퇴근한 뒤였다. 은호가 노트북을 덮었다. "…끝났네요." "네." "1년 반이요." 태경이 의자에 기댔다. 그러곤 천장을 봤다. "작년 이맘때 제가 뭐 했는지 아…
  91. 91화 4월 — 4월이 됐다. 싱가포르는 계절이 없었다. 그래도 4월이 되니 은호는 자꾸 서울을 생각했다. 작년 4월에 태경이 떠났고, 재작년 4월에는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두 사람은 강가를 걸었다. 정확히는 강이 아니라 만이었다. 바닷물이었고 짰다. 그래도 걷기엔…
  92. 92화 그 사람 이름 — 5월 첫째 주, 태경이 서울 출장을 갔다. 이틀이었다. 본사 보고와 인사 면담. 은호는 지사에 남았다. 둘째 날 밤, 태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안 잤어요?" "네." "내일 오전 비행기예요." "네." 잠깐 정적이 있었다. "은호 씨." "네." "오늘 인사…
  93. 93화 공항에서 — 태경이 돌아오는 날, 은호가 공항에 나갔다. 이번엔 반차를 냈다. 지사장이 아니라 운영 담당이 반차를 내는 건 훨씬 쉬웠다. 입국장에서 태경이 나왔다. 캐리어 하나. 그건 언제나 같았다. "…또 왔네요." "네." "반차요?" "네." 태경이 짧게 웃었다. "작년 9…
  94. 94화 이번 분기 목표 — 주차장에서 차까지 가는 길은 짧았다. 두 사람은 그 짧은 길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은호 씨." "네." "작년에 제가 인수인계 메모 썼을 때요." "네." "거기 안 쓴 게 하나 더 있어요." 은호가 걸음을 멈췄다. "지안 과장 얘기 말고요?" "네." "뭔데요.…